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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ny 작성일25-03-04 17:26 조회1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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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익 인천성지,수원성지 교수, ‘닫힌 성지와 열린 성지~’ 발제 전문기자명입력 2024.12.19 13:20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가 12월 11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닫힌 성지와 열린 성지: 천진암과 주어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이날 세미나는 조계종 사회부(부장 도심 스님) 주최,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본부장 송탁 스님),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위원장 향문 스님)의 주관으로 열렸다. 발제전문을 게재한다. 닫힌 성지와 열린 성지: 천진암과 주어사 연대기 1. 천주교 성지의 연대기(1) 순교, 성인, 성지흔히 종교는 자기 종교의 초기 역사, 즉 자기 종교의 기원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종교의 기원은 신화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각 종교는 자기 역사를 성스러운 것으로 변형시킨다. 천주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종교사’가 각 종교의 신념을 강화하는 ‘내부 자료’로 활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자처하기 시작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이제 우리는 ‘종교적인 종교사’가 현실 종교 질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시대, 지극히 종교적으로 윤색된 종교사가 객관적인 역사 기술을 압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적인 것’이 객관과 실재의 자리를 요구하더라도, 이를 대체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학문적 담론의 힘은 너무 미약하다. 현재의 학문적 분위기를 보면 종교의 영적 자원과 신화적 자원에 비해 종교에 대한 정확한 역사 서술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그런데 ‘종교적인 종교사’가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대체할 때, 특정 종교는 정치적인 힘과 기술을 활용하여 현실의 ‘종교 풍경’을 작위적으로 변경할 것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역사, 임의로 해석된 역사가 ‘종교 문서’에 그치지 않고 현실 종교 질서를 교란하고 전복하게 되는 것이다.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반성과 비판이 결여될 때, 사회적인 사실과 역사적인 사실은 증발하고 특정 종교의’ 종교적인 사실’만이 현실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에서 나는 ‘성지(聖地)’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한국 천주교가 왜 언제부터 자기 종교의 초기 역사를 이토록 과장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천주교의 초기 역사에 대한 왜곡과 자의적인 해석이 어떤 종교적인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지, 이러한 맥락에서 천진암과 주어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종교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천주교의 경우 천주교라는 명칭 자체도 확정적이지 않았다.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천주교’보다는 ‘불란서교회’ 또는 ‘프랑스교회’라는 명칭이 일상 속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천주교 측에서는 ‘가톨릭교’ 또는 일본식으로 ‘천주공교(天主公敎)’라는 명칭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만큼 아직 천주교의 종교적인 위상과 입지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심지어 공식 조사에서도 천주교는 ‘천주공교’라는 이름으로 개신교의 여러 교파와 함께 기독교의 한 교파로만 분류되고 있었다. 천주교가 종교의 분류체계 내에서 여전히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그런데 1925년 7월 5일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김대건과 정하상을 비롯한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위가 시복(諡福)되면서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순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직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1862년에 나가사키(長岐) 순교자 26위가 시성되어 성인(聖人)으로 숭경받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천주교의 ‘성인 숭배’에 자극받은 한국 천주교는 이때부터 ‘성인’과 ‘순교’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주교의 모든 관심이 초기 역사에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천주교가 ‘근대 종교’로서 타종교와 차별성을 확보하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계기가 더 필요했다.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종교와 향사 요람(朝鮮に於ける宗敎及享祀要覽)⟫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공인 종교(신도, 불교, 기독교)의 신도수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신도수 증감 상황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천주교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간략히 추론해 보고자 한다.천주교의 신도수는 계속 증가하여 1926년에 90,555명에 이르지만 1927년에 갑자기 49,593명으로 격감한다. 이 영향으로 기독교 전체 신도수도 299,563명에서 265,075명으로 감소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불교의 신도수는 큰 변화가 없고, 오히려 조선불교의 신도수는 170,354명에서 189,831명으로 19,477명 증가한다. 그렇다면 1925년 79위 시복식을 계기로 천주교의 신도 계산 방식이나 신도 자격에 대한 통계가 변화를 겪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어쨌든 1927년에 조선불교는 천주교보다 약 3.8배, 불교 전체는 약 7.45배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도수가 265,075명이었으므로, 기독교 안에서 천주교 신도는 약 18.7%에 불과했다. 1927년에 천리교(天理敎), 신리교(神理敎), 금광교(金光敎), 신습교(神習敎), 대사교(大社敎), 부상교(扶桑敎), 신도(神道), 흑주교(黑住敎) 등 교파신도의 신도수는 78,488명이었다. 따라서 1927년에 천주교의 신도수는 신도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천주교는 여전히 공인 종교 안에서 가장 적은 신도수를 보유한 ‘소수 종교’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1931년이 되면 천주교의 상황이 조금 변화한다. 1831년에 조선 대목구(代牧區)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대목구장에 임명되면서 조선은 정식 포교지가 된다. 따라서 1931년은 조선이 정식 포교지가 된 인천성지,수원성지 지 100주년이 되는 기념할 만한 해였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 천주교는 세계 천주교 안에서 여전히 ‘포교지’라는 불안정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해방 후 1962년 3월 10일이 되어야 정식 교구에 편입될 예정이었다. 당시 대주교는 프랑스인 뮈텔이었고, 경성, 평양, 대구, 원산의 4교구에서 각 주교(主敎)가 교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인 주교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아직 조선인 주교 후보자만 있었고, 여전히 1942년 11월 10일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탄생을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1931년에 포교 100주년을 맞이한 천주교는 조선인 주교의 탄생과 정식 교구로의 승격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것이다.포교 100주년 이후 천주교 신도수는 1931년 말 67,780명에서 1932년 말 76,806명으로 1년 새 1만 명 가량이 증가했고, 1933년 말에는 다시 95,520명으로 1년새 2만 명 가량 급증했다. 1933년에는 신도의 신도수 88,229명을 추월하여 드디어 천주교가 신도수 최하위 자리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천주교와 신도의 신도수는 늘 큰 차이가 없었다. 그 후 1934년 말에는 101,774명으로 드디어 천주교 신도수가 처음으로 10만 명을 돌파했다. 그후 1938년에 122,201명을 정점으로 다시 천주교 신도수는 감소했고, 1941년에는 109,210명으로 줄었다.이후 종교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천주교는 순교, 성인, 성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초기 신화를 공간화하는 작업에 치중했다. 즉 천주교의 ‘종교적 사실’을 땅과 지도에 기입하고 각인하여 ‘공간적인 종교’로 거듭나는 방식을 지향한 것이다. 1939년 이후 천주교의 성지 조성 전략은 대체로 비슷했다. 일상적인 공간과 풍경에 천주교 성지를 건립한 후 이것을 ‘자연화’하고 ‘일상화’하는 것,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성지가 낯선 ‘종교적인 사물’이 아니라 친숙한 ‘일상적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이 성지 조성의 기본 방향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천주교의 성지는 분리와 단절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일상에 스며드는 자연스러운 성스러움을 지향했다. 성지를 자연화하고 일상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인내심을 요하는 긴 시간뿐이었다. 어쩌면 은밀하고 조용하게 천주교의 성지는 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2) 천주교 성지 조성의 문제점한국 천주교의 성역화는 1925년 7월 5일에 있었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 이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아 1939년 전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1968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1984년에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복자 시성식, 2014년에 광화문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 등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이 벌어졌다.2014년 시복식을 예로 들어 보자. 2014년에 진산사건과 관련된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이 시복된 후 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는 본격적으로 진산성지가 조성되고 있다. 2014년에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7명이 시복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해 서소문 성지의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2014년에는 홍주의 순교자 4인이 시복되었고, 역시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홍주성지와 순례길이 조성되었다. 또한 진천 출신 오반지가 시복되고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준비하면서 진천의 배티성지 개발이 촉진되었다. 해미의 순교자인 인언민, 이보현, 김진후도 2014년에 시복되었고, 이를 전후해 해미순교성지의 성역화와 순례길 조성이 가속화되었다.현재 한국 천주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시복,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 시복을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시복식 이전과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는 여전히 253위 시복식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 숫자는 그전에 있었던 103위 시성식과 124위 시복식, 즉 총 227위 시복시성식을 능가한다. 따라서 과거에 진행되었던 한국천주교 성역화는 더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그 완성도를 점점 높여갈 것으로 보인다.한국 천주교의 과도하고 집요한 성역화가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이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교, 성인, 성지가 구성하는 삼각형은 이제 한국 천주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형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순교, 성인, 성지라는 종교적 세트는 앞으로는 아예 한국 천주교의 종교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순교는 과거에 일어난 천주교회사의 종교적 사건이다. 그러나 순교는 조선 정부가 서구 세력과 충돌하면서 빚어진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사회적 사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순교 사건은 종교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평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순교라는 사태 앞에서 냉정한 역사적인 평가와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순교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종교적인 평가가 역사적인 평가를 대신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교라는 종교적인 개념이 ‘순교 사건’에 대한 다른 개념화를 막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것은 순교다”라는 선언 앞에서 “그건 순교가 아니다”라는 반론을 제시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시복식과 시성식은 평범한 사람을 성스러운 인간으로 승급시키는 종교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복자와 성인은 인천성지,수원성지 특정한 사람의 언행과 삶에 대한 종교적인 가치 평가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복자와 성인은 역사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교적인 평가를 통해 만들어진 철저하게 ‘종교적인 구성물’이다. 즉 시복식과 시성식이라는 종교 의례는 특정 인간의 언행와 인생에 대한 종교적인 평가와 해석의 결과물이다.시복과 시성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천주교에서 시성식과 시복식은 한 인간에 대한 여타의 모든 해석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해석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시복과 시성이라는 종교적인 해석이 다른 모든 역사적인 해석을 억압하고 잠재우는 상황과 자주 대면하고 있다. 이처럼 천주교에서 시복과 시성은 역사의 특정 장면을 서술하는 유일한 언어이자 문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순교, 시성식, 시복식와 관련하여 충분한 ‘인식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종교적인 해석을 역사적인 해석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천주교가 시복식과 시성식이라는 종교 의례를 통해 내린 순교 사건에 대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성지라는 땅에 기입된다. 즉 성지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절대적인 종교적 해석을 기록한 땅이다. 그리고 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땅의 힘’에 의해 종교적인 해석은 스스로를 역사적인 해석으로 위장하게 된다. 성지를 통해 종교적인 해석이 보다 쉽고 강건하게 역사화 된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한국천주교의 경우 103위 성인 가운데 27위 성인의 유해만 보존되어 있을 정도로 순교자의 유해 보존율이 매우 낮다. 따라서 묘소가 아니라 탄생지, 사적지, 순교지 등을 중심으로 성역화가 진행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엄밀하고 실증적이고 역사적인 조사 없이, 또한 적절한 자료 없이 풍설, 억측, 추측에 기댄 과도한 해석에 의존하여 성역화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천주교 성지의 경우, 성스러움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성스러움의 밀도가 희박하고, 성스러움의 강도가 약한 장소들이 의외로 많다. 이 때문에 한국 천주교는 성스러움의 정확도를 높이고, 성스러움의 밀도를 증가시키고, 성스러움의 집약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예컨대 유명 순교자를 기념하는 성지에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하거나,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순교자의 유해를 모아 해당 장소의 성스러움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또한 역사적인 조사만으로 성스러움의 정확도를 높이기 어려운 경우에는 과감하게 소문, 풍설, 풍문, 허구화 등을 통해 ‘성스러움의 증인’을 확보하기도 한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같은 식물을 순교의 증인으로 소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1세기 이후 증가하고 있는 천주교 사적지의 ‘문화재화 현상’도 성스러움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의 검증이나 공인 과정을 통해 해당 장소의 성스러움에 대한 여타의 의심을 해소하는 것이다.(3) 상상의 역사와 상상의 지도시복식과 시성식을 마치 국가적인 행사처럼 개최하고 이와 관련하여 거대한 기념물을 조형하는 방식을 통해 이제 천주교의 성역화는 ‘종교’보다는 ‘문화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현재 성지라는 거대 기념 공간의 구축, ‘문화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경제적 지원, 종교적인 순례를 관광 자원인 것처럼 포장하는 눈속임, 공공성이라는 가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편법적인 종교적 지원 등은 계속 많은 논란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종교간 형평성 논란’을 통해 종교 갈등의 진원지로 전락하고 있는 행정기관, 종교성의 재구성보다는 물질성과 주술성의 강화에 의존하는 한국 천주교의 마법화 현상, 종교를 기념하기 위해 쏟아붓고 있는 엄청난 경제적 재화,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조선시대의 희생과 핍박의 역사에 대한 역사적, 물질적 보상을 받으려는 천주교 등이 과도한 성역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의 자기기만과 이율배반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러하듯 천주교도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성역화에는 한국천주교의 실수나 과오에 대한 어떠한 참회나 반성도 없다. 명확하고 정확한 사실을 천주교에 유리한 방식으로만 해석하고 모든 논란을 의도적으로 간과함으로써, 한국천주교는 자기만의 완벽한 ‘상상의 역사’를 구축하여 그 역사 안에 유폐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의 역사’는 성지화를 통해 ‘상상의 지도’에 투영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천주교는 자기만의 상상의 공간 안에 갇히고 있다.배교자의 순교자화, 비순교의 순교화 등의 문제가 향후 한국천주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볼 일이다. 더 큰 문제는 과도한 성인화 및 성역화에 대한 자정 작용이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자기 종교의 역사를 냉정하게 재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한국 천주교의 진짜 위기일지도 모른다. 천주교가 자기 종교 밖의 다른 이해 방식을 거부한 채 자기의 독선적인 언어와 해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천주교의 인천성지,수원성지 미래에 가장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한국 천주교의 성역화 현상은 교구별로 중심 성지를 구축하는 형태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교구별로 성당, 성인, 성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천주교의 성스러움을 ‘지역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상 공간에서 천주교 성지와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특히 서울이나 지방의 대도시에 조성된 성지가 그러하다. 일반인과 신자가 일상공간에서 천주교와 마주칠 수 있는 빈도와 기회를 늘려가는 것은 성역화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다.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역사 해석의 ‘자연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즉 심지어 잘못된 해석이나 정보가 공공의 묵인하에 일상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간물로 자리잡을 때, 이것은 편향적인 해석조차 자연스러운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을 것이다.또한 저개발로 공동화된 농촌 지역 사회에 거대한 천주교 성지가 조성되고 지역 사회에 갑자기 이질적인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다. 타 종교보다 웅장한 건물을 지어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즉 명소로 자리 매김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천주교의 공간적 팽창, 즉 천주교의 거대화와 가시화는 타 종교를 긴장시키면서 현대적인 종교 갈등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종교는 신자 감소, 교세 위축, 종교성의 와해 등으로 종교적 위기를 겪고 있다.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건재를 과시하며 위기를 간접적으로 극복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으로 종교의 찬란하고 화려하고 과거, 또는 비극적이고 치열한 과거, 또는 해당 종교의 사회적 유의미성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공로 등을 ‘문화’ 또는 ‘문화재’라는 형태로 물질화 함으로써 종교적 위기를 타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종교의 문화화 현상’은 물질화된 종교를 순례와 관광의 타겟으로 공간 안에 고정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성지는 해당 종교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유의미성에 대한 증거처럼 작용하고 있다.일반 시민사회와 타 종교는 천주교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편향적이고 편법적인 지원이 정교분리와 신교자유의 원칙에 위배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특정 종교의 공공성이 아니라 종교성을 증폭시키는 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즉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이 정말 누구를 위해 쓰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천주교 성지에 가보면 천주교 신자를 제외한 일반 관광객은 거의 없다. 즉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은 모든 성지는 관광지라기보다 그저 거대한 천주교 시설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천주교 측의 의도와 달리 사람들은 이제 인위적이고 자의적으로 조성된 성지나 성스러움에 큰 관심이 없다. 사실이 아니라 천주교식의 전설이나 풍문에 기대어 조성된 성지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대부분의 천주교 성지에서는 지역민이나 일반 사회의 무관심, 천주교의 과도한 열정, 지자체의 헛된 기대가 묘하게 씁쓸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천주교 성지의 상품성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평가는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천주교 성지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문화 상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천주교의 성역화 사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열정이 경제적 저울질에 의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천진암 주어사 연대기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과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에는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1779년에 천진암주어사(天眞庵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도 1777년에 강학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일반적으로 한국천주교는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1784년을 한국 천주교의 기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천진암주어사 강학회에 근거하여 한국천주교 전래 3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70년대 말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서 천진암대성당 건축 사업(2079년 완공)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에는 한국천주교 창립선조 5위(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의 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앵자봉 부근으로 추정되는 주어사(走魚寺)의 경우, 남상철이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가 발견됨〉이라는 글을 1962년 11월부터 1963년 1월까지 《경향잡지》에 3회 연속 게재하면서, 천주교 내부에서 주어사와 천진암 가운데 정확한 최초 강학회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그동안 천주교 측에서는 ‘산북성역화위원회’를 조직해 주어사지(走魚寺址)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2009년에는 당시 여주군에서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 산 106번지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마치고 〈여주 주어사지〉라는 학술 조사 연구보고서를 발행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주어사의 복원 문제가 공론장의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당시 지자체에서는 주어사지에 대해 문화 사업과 관광 사업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다. 특히 ‘천주교의 발상지’와 관련한 ‘시설 복원’이나 ‘건축 사업’의 문제로만 접근함으로써 종교적인 논란을 비켜가고자 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만으로 볼 때, 천주교의 천진암 대성당 건축 사업처럼 또 다시 주어사지를 둘러싸고 천주교와 불교의 종교 간 성지 갈등이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1) 천진암 연대기천진암이라는 인천성지,수원성지 지금은 폐사된 암자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원이 된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면서 천진암성지의 성역화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래 없이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천진암의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 있는 정하상과 유진길은 1984년 여의도에서 시성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가운데 정약종은 2014년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은 ‘조선 왕조 치하 133위’ 명단에 올라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천진암의 순례, 공경, 기적을 강조하는 천진암성지가 이들의 시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록 배교자일지라도 광주 출신인 이벽은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 격에 해당하기 때문에 변기영 신부 등을 중심으로 이벽을 성조로 하는 천진암 성지 개발이 이루어져 왔다.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1777년에 권철신의 주도로 정약전, 이벽 등이 절에 모여 서양 선교사들의 책을 연구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정약용이 쓴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을 보면, 1779년 겨울에 천진암 주어사 또는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1962년 즈음 남상철은 정약용이 쓴 권철신의 묘지명에 근거해 주어사와 천진암을 찾다가, 일제강점기에 ⟪조선 사찰 조람⟫을 편찬하기 위해 준비한 원고에서 천진암이 경기도 광주의 앵자산에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주어사와 천진암의 옛터를 조사한 후에 1962년 11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총 3회에 걸쳐 ⟪경향잡지⟫에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인 주어사 발견됨⟩이라는 글을 게재한다. 특히 그는 최초의 강학 장소로 주어사를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벽이 처음 강학한 곳이 주어사인지 천진암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주교 강학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한국천주교에서는 1975년에 천진암 터의 매입을 시작했고, 1979~1987년까지 창립선조 5위, 즉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의 묘와 그 직계가족의 묘를 천진암 성지로 이장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을, 1994년에는 광암성당을 완공하고, 성모경당과 박물관을 짓고 있으며, 1986년부터는 100년 계획을 세워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천진암대성당 관련 자료를 보면, 건축 기간을 1979년에서 2079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설계도를 작성하였고, 1993년에 정초식을 하였고, 1996년에 첫 기둥 공사를 착공하였고, 2001년에 임시 4대문 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진암대성당은 총 연건평 3,300평으로 단층 건물이며, 3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높이 85m의 거대 성당으로 지어질 예정이다. 세계적인 명소로 기록될 수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당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한국천주교에서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 시복식에서 시복된 정약종을 제외한 나머지 창립 선조 4위에 대한 시복 역시 준비하고 있다. 어찌 보면 한국천주교에서 천진암 성지화 사업은 종교의 명운을 건 대사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발상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주교의 기점을 확립하고자 하는 교리적, 역사적, 지리적인 중요 사건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측에서는 천진암 강학에 참여한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각지의 순교지를 성역화함으로써 한국천주교의 ‘성지 지형도’를 완성하려 할 것이다. ‘창립 선조’ 5위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시조(始祖)’를 공식화하고,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라는 표현을 통해 천주교회의 역사적 기원점을 1779년으로 확정할 뿐만 아니라, 천진암대성당 자리를 한국천주교회의 지리학적 중심으로 확립하려는 다차원적 시도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그러나 ‘천진암 대성당’이나 ‘천진암 성지’라는 말은 불교의 사찰명에 천주교 성지나 대성당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점에서, 성지 조성 사업이 낳은 기묘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암자의 이름을 굳이 붙인 것은 ‘종교 교체’나 ‘종교 정복’이라는 함의를 담으려는 의도일 수 있기 때문에, 불교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한 작명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천주교와 불교의 ‘성지 공유’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사실 천진암과 주어사는 이미 폐사를 겪은 절, 불교사에서 잊힌 절이었고, 천주교에 의해 다시 기억되기 시작한 절이다. 천진암과 주어사는 한국불교사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그러나 한국천주교에서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찰이다. 결국 우리는 성지 갈등 속에서 ‘의미’와 ‘해석’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정부나 지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천진암과 주어사가 어떤 종교에게 더 의미 있는 장소인가에 대한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지 개발이나 사찰 복원은 결국 문화적, 역사적 기억의 복원이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천진암과 주어사가 어떤 역사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이 땅이 현재 어떤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천주교와 인천성지,수원성지 불교에서 천진암과 주어사라는 공간이 어떤 종교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물음일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와 문화에서 천진암과 주어사가 복원할 만한 기억의 장소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변기영 신부는 1980년 9월 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벽과 천진암⟩이란 칼럼에서 천진암 강학회에서 권철신, 정약전, 이승훈, 정약용, 이벽이 모든 경서에 담긴 도리를 비교 검토하고, 우주 만물에는 조물주인 천주가 있고 사람에게는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으며 죽은 후에는 상선벌악을 하는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등 천주교 도리를 대강 믿고 깨닫고 믿게 됐으며, 여기서 한국천주교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때 이벽이 “천주공경가”를 짓고,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으며, 권철신은 일과표와 규정을 만들었다는 단정했다.변기영 신부에 따르면 이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일과표에 따라 모든 학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한 후에 “숙야잠”을, 해가 뜨면 “경재잠”을, 정오에는 “사물잠”을, 해가 지면 “서명”을 외웠다. 그리고 7일마다 하루를 주일로 지켜야 함도 알았으나 우리나라에는 양력과 요일이 없어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 주일로 정해 지키면서 5년 정도 진리 탐구와 실천에 전력을 다했다. 따라서 이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이벽은 서학을 서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체계화하고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선교사의 개입도 없이 ‘온전히’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한국 천주교 신앙의 움을 틔우고 싹이 돋게 하였다는 것이다. 서양의 이탈리아 로마는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유태인 선교사가 포교하였고, 일본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포교했으며, 독일은 보니파시오가 포교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에서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지만, 한국 천주교회만은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가 입국했을 때 이미 4천 명 이상의 영세 신자들을 만나보고 놀랐을 만큼 우리 손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그런데 최석우 신부는 1981년 12월 4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천주교 발상지에 이론: 광주 우산리 아니고 여주 하품리다⟩라는 기사를 통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성역화된 천진암은 거리상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즉 천진암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현 위치가 아니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변기영 신부는 현 위치에서 “천진사(天眞寺)”라는 명문이 있는 그릇이 출토되는 등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고 반박했다.또한 최석우 신부는 1981년 12월 4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한국 천주교 신앙 발상지는 천진암이 아닌 주어사였다⟩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 발상지는 천진암이 아니라 주어사라고 주장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정약용의 묘지명을 종합해 볼 때 강학회를 개최한 연대는 1777년 내지 1779년이고 개최 장소는 주어사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최석우 신부는 주어사를 기점으로 새로 발견된 천진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새로운 천진암’이 달레의 기록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즉 변기영 신부가 성역화하는 현재의 천진암보다는 새로 발견된 천진암이 “진짜 천진암”일 개연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최석우 신부는 주민들의 제보, 문헌 기록, 현장 답사를 종합해 볼 때 ① 강학회의 장소는 천진암이 아니라 주어사였고, ② 천진암조차도 현재의 천진암 성지가 아니라 주어사 인근에 있었으며, ③ 성지 개발에 앞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세 가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최석우 신부에 따르면 현재의 천진암도 가짜인 셈이다.다시 변기영 신부는 1981년 12월 8일 자 경향신문의 ⟨천진암이 한국천주교 발상지: 번기영 성역화 주임 신부 최석우 신부의 주장 반박⟩이라는 기사를 통해 다산의 시, 여지도서, 기왓장 사기 그릇에 새겨진 금석문, 빙천뿐만 아니라 천진암 인근 주민들, 주어사 자료의 부재 등을 근거로 최석우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최석우 신부는 경향신문 1981년 12월 14일 자 기사 ⟨최석우 신부, 변기영 신부의 반론 반박, 주어사에도 빙천(冰泉) 있었다⟩를 통해 변기영 신부가 문헌과 논문을 잘못 독해했다고 비판하면서 현재의 천진암은 소암(小庵)이며 소미 마을에 있는 것이 진짜 천진암이라고 재차 주장했다.1981년 12월 17일 자 매일경제의 ⟨천주교 순례지 성역화 추진중 천진암 위치 싸고 논란⟩이라는 기사는 수원교구 신장본당 변기영 신부의 주도로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추진 중인 가운데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인 최석우 신부가 최근 천진암 터는 지금 작업 중인 위치의 반대편 산등성이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이때 변기영 신부는 최석우 신부가 천진암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일출암(日出庵) 터이고 천진암 터는 현재 작업 중인 곳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그런데 경향신문 1981년 12월 25일자 기사 ⟨주어사선 한 때 실학 강의만⟩에 실린 기고글에서 변기영 신부는 다산의 묘지명에 근거해 강학회의 장소나 연대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이벽을 중심으로 하여 강학회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점을 전환했다. 다산의 묘지명이나 달레의 천주교회사 인천성지,수원성지 기록만으로는 천진암 강학회의 사실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산의 시문을 끌어들여 천진암이 이벽의 독서처였다는 것을 강조했다. 1979년에 가장 먼저 이벽의 묘를 천진암 터로 이장한 것도 천진암이 이벽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찌 보면 이벽을 중심에 두면서 천진암은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등 천주교 초기 역사를 어지럽힌 배교자들을 정당화하는 성지로 자리하게 되었을 것이다.또한 변기영 신부는 천진암뿐만 아니라 80평 내외의 주어사에서도 강학회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주 본거지는 5천여 평의 천진암이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논점을 흐리기 시작했다. 결국 최석우와 변기영의 논쟁은 천진암과 주어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가 성역화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말았다.1982년 2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스케치: 한국 천주교 ‘발상지’ 논쟁 재연⟩을 보면, 변기영 신부는 광주부읍지의 기록과 지도를 내세워 천진암이 광주 퇴촌면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최석우 신부는 정약용의 권철신 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로 나오지만 정약전 묘지명에는 “주어사”만 언급되고 있다는 이유로 최초의 강학지는 주어사였다고 주장했다. 천진암이든 주어사든 변기영과 최석우는 모두 천주교 강학이 이곳에서 열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약용의 묘지명은 유교 강학회를 언급할 뿐 천주교 강학회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마침내 경향신문 1983년 8월 19일자 기사 ⟨한국천주교 신앙 발상지 논쟁 재연: 이원순 교수 천진암설에 반론⟩을 보면, 당시에 이원순은 ⟨천진암주어사 강학회 논변⟩이라는 논문을 통해 천진암과 주어사는 천주교 발상지가 아니라 천주교 강학회가 있었던 곳일 뿐이라는 제한적인 입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원순의 주장은 결국 천진암뿐만 아니라 주어사도 강학회 장소였으므로 성역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경향신문 1984년 2월 2일자 ⟨한국교회 ‘외화(外華)’ 껍질 멋고 깨어나라⟩라는 기사를 보면, 최석우 신부는 ⟨한국천주교회기원⟩이란 글에서 1770~1784년을 신앙의 요람기로 설정하고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이 한국교회의 기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광도 ⟨한국초기교회사와 주어사⟩라는 글에서 이벽이 천주교 신앙을 탐구한 절은 주어사지만 한국천주교회사연구가 요람지난 발상지 같은 최초의 사건에만 집중되는 경향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천진암성지를 둘러싼 논란은 1990년대에도 이어졌다. 한국천주교회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가운데 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진암성역화위원회가 1990년 6월 24일에 천진암 현지에서 ‘교회창립 2백 11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기로 하면서 교회 창립 연도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었다. 최석우 신부는 “한국천주교계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동아와 선교 활동을 편 것을 교회 창립 시점으로 삼고 있다”면서 조선교구 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1884년을 교구 창립 1백주년으로 인정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변기영 신부는 1979년 당시 노기남 대주교, 교황대사 안젤로니 대주교 등이 교회창립 2백 주년 행사를 가졌던 사실을 들어 이벽, 권철신 들이 천진암에 모여 강학회를 열고 교리에 따라 주일을 지키기 시작한 1779년이 교회 창립의 해라고 주장했다. 천진암으로 인해 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에 대한 논란이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장소가 아니라 시기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2) 주어사 연대기1970년대부터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주어사지가 속한 지역을 포함해 주변 지역을 매입 또는 불하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년에 여주시는 여주 주어사지에 대한 지표 및 학술 조사 추진했다. 주어사는 천주교 발상지로서 상대적으로 그 성격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여주의 종교 관련 문화재이므로, 여주군이 주어사지에 대한 세부적인 지표 조사 및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개발과 문화 유적 보존의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조사는 2009년 2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수행되었다. 당시 건물지의 석축단, 석렬, 구들 시설, 숯가마 터 등이 남아 있었고, 조사를 통해 총 5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그 후 2011년에 여주군은 한국 천주교 발상의 요람지인 주어사지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만들고자 정비 계획을 세웠다. 이미 2010년에 돌계단 및 로프난간을 설치하는 등 탐방로를 개선했고, 2011년에는 안내간판을 설치했다. 주어사의 연혁과 현황을 설명한 종합안내판, 석축과 건물지 현황을 설명한 건물지안내판, 주어사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제작한 방향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편의를 도모했다. 2011년 6월 13일에 여주군 산북면한국 천주교의 요람인 ‘주어사지 길’을 정비했다. 동년 9월 22일에도 산북면은 주어사지길 주변 환경 정비를 실시했다. 이는 일반인, 등산객 및 성지순례자 등 주어사지를 찾는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제23회 여주도자기축제, 여주 남한강 가을축제, 제7회 품실축제 등 각종 행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2016년에 되면 주어사지의 천주교 성지화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2016년 11월 5일에 산북면 주어리 마을회관에서 수원 아리담문화원 주최로 주어사의 올바른 역사 계승을 위한 화합한마당이 열렸다. 이날 인천성지,수원성지 전국 각지에서 온 불교, 천주교, 유교 관계자들 500여 명과 방영철 산북면장을 비롯한 지역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추모의식, 뮤지컬, 판소리 공연 등이 진행됐으며,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역사의 뜻을 기리는 ‘종교화합의 한마당’으로 그 의미를 더했다.그러나 2019년에 여주시는 ‘여주 주어사지 기본 정비 계획’을 세웠다. 2km 정도의 진입로를 콘크리트 포장하여 정비하고, 주어사지 탐방로 400m를 정비하고, 아울러 석축도 정비해 폭을 확대하는 공사를 하며, 주어사지 인근에 ‘주어사지 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주어사지 전시관’은 1층(207제곱미터)이며, 강학실, 강의실, 사무실이 있는 한옥과 전시실이 있는 한옥이 연결된 형태였다. 또한 문화재안내판을 세우는 것도 정비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주어사지에는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이처럼 2019년까지만 해도 천주교가 중심이 되어 여주시가 ‘주어사지 전시관’을 건립하고 천주교에서 이를 중심으로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기본 계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후 불교계에서 주어사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주어사지를 천주교만의 성지로 성역화하는 일은 향후 더 이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2022년 5월 20일에 여주시와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주어사지에서 주어사지 시굴 조사에 대한 조사 성과 공개 설명회를 개최했다. 여주 주어사지는 확인된 유구와 유물, 문헌사료를 통해 조선 후기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1982년 산림청으로부터 40년간 장기 임대한 주어사지 일대 토지의 임대기간이 2022년 3월 종료되었다고 한다. 3. 천주교 성지의 미래2023년 8월 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7년 8월 서울에서 천주교 ‘세계청년대회’가 개최된다고 발표했다. 2014년 8월에는 ‘아시아청년대회’와 함께 광화문에서 124위 시복식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아시아 청년 대회 및 광화문 시복식을 전후하여 정부와 지자체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전국적으로 천주교 성역화가 진행되었다. 예컨대 서소문성지, 해미성지, 솔뫼성지, 신리성지, 황새바위성지, 배티성지는 2014년 아시아청년대회와 시복식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2027년 8월 세계청년대회와 맞물려 많은 천주교 신자가 서울에 집결할 것이다. 따라서 이때 다시 새로운 시복식(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이 한두 차례 열리고, 이를 전후하여 대대적인 성역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무엇보다도 매우 가까운 시기에 최양업 신부의 시복식이 열릴 가능성은 매우 크다. 이미 최종 단계인 기적심사가 완료되었고, 2022년 3월에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 시성 기도문이 승인되었다. 2014년 광화문 시복식의 경우에는 2012년 10월 18일에 최양업 신부를 포함한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 시성 기도문이 승인되었고, 2년 뒤에 시복식이 열린 바 있다.또한 현재 이벽, 김범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이존창 등 초기 천주교회사의 주요 인물이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라는 이름으로 시복을 앞두고 있고, 2021년에 교황청 시성성 심사가 시작되었다. 광화문 시복식의 경우 2009년 5월 28일에 교황청 시성성 심사가 개시되어 불과 5년 만에 시복식이 열린 전례가 있다. 따라서 2027년 이전에 심사를 마치고 2027년에 서울에서 133위 시복식이 열릴 가능성은 여전히 매우 높다. 세계청년대회도 그러한 계획 속에서 추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자로 간주되는 이벽과 관련된 명동성당, 직접적인 순교는 아니지만 최초의 순교자로도 간주되는 김범우의 묘, 최초의 세례 교인인 이승훈을 기리는 인천의 이승훈 역사공원,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의 묘가 있는 천진암성지 등이 집중적인 성역화의 대상이 될 것으로 주목된다. 지역별로는 홍주, 충주, 청주, 죽산, 전주, 여주, 양근, 수원, 서울 포도청, 서울 양화진, 상주, 대구, 남한산성, 공주, 나주 등지의 순교자가 시복 대상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울, 남한산성, 공주, 홍주 등이다. 2023년 5월 20일에는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에 위치한 광암이벽기념성당이 문을 열었다.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에는 초기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들 가운데 이벽,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이존창 같은 배교자나 김범우, 이벽 같은 비순교자가 여럿 포함되어 있다.‘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식도 빠른 속도로 준비되고 있다. 2022년 9월 2일에 교황청 시성성 심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14년 광화문 시복식을 고려하면,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식도 2027년에 열릴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넉넉하다. 2027년에 서울에서 두 번의 시복식이 연거푸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는 신부와 수녀가 많다. 평양, 중강진, 진남포, 서울, 당진, 전주, 대전 등이 대상 지역이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와 관련해서는 목포의 산정동 성당, 춘천의 죽림동 성당, 양양성당, 수원성지 등이 주목할 만한 곳이다. 특히 ‘목포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은 2021년 5월 10일에 한국 성당 최초로 ‘준대성전’(Minor Basilica, 준 바실리카)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므로 교황 방문의 최적지로 손꼽을 수 있다.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가 12월 11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닫힌 성지와 열린 인천성지,수원성지 성지: 천진암과 주어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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